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문단 편집) === 사라진 건물 === * 舊 [[국립중앙도서관]] 소공동 건물: 1923년 일제가 남별궁 터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세웠으며, 해방 뒤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개편됐다가 1973년 남산 어린이회관 건물로 이전 후 반도호텔과 함께 신규법인 [[호텔롯데]]에 넘어가 철거됐고, 그 자리에 [[롯데호텔 서울]]이 들어섰다. * 반도호텔: 1938년 일본인 사업가 노구치 시타가후가 조선호텔 뒷편에 세웠다. 해방 후 운영주체가 교통부, 국제관광공사로 각각 바뀌다가 1973년 국립중앙도서관 건물과 함께 [[호텔롯데]]에 매각된 후 철거되어 [[롯데호텔 서울]]이 들어섰다. * [[화신백화점]]: 1937년 11월 건설된 당시 [[경성부]]에서 제일 큰 백화점. 해방 후에도 계속 운영되다가 1967년 (주)신생에 건물 소유권이 넘어갔다. 1980년 [[화신그룹]] 부도 후 1985년에 문을 닫았고, 1986년에 한보주택이 부지를 인수해 백화점을 새로 지으려다 1987년 부지가 동방생명에 넘어간 후 철거되었으며, 2000년부터 [[삼성그룹]] 소유의 종로타워가 들어서 있다. * 내자호텔: 1935년 일본 산고쿠(三國)석탄회사가 직원 숙소로 지은 건물. 광복 이후 미군에 접수되어 한동안 장교 숙소 등으로 이용되다 1972년 대대적인 보수로 "내자호텔"이란 이름의 호텔로 개조되었다. 1990년 4월 서울시가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사직로 확장을 명목으로 그해 8월에 철거되었다. * 소원(素園):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5-1 소재. 1939년 건립 후 시인 육당 [[최남선]]이 1941년부터 11년간 거주해왔다. 한동안 최남선 가족 소유였으나 2002년 차남 최한웅이 사망하면서 고택이 두온종합건설에 매각되었고, 보존 여론도 있었으나 서울시는 원형 훼손 및 육당의 친일행적 등을 이유로 거부했다. 결국 2003년 1월 철거되어 저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철거 후 잔존 유품들은 연구가나 소장가들 손에 넘어갔고, 표지석은 개천에 버려졌다가 2007년에야 옛터로 돌아왔다.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655|동양극장]]: 1935년 충정로에 건립된 극장이며 이 극장을 배경으로 한 [[동양극장|동명의 KBS2 주말연속극]]도 있다.[*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 유명한 '''[[심영(배우)|심영]]'''.] 1980년대 후반에 [[현대건설]]이 소유하면서 서울시와 협상을 벌였다가 1990년 2월 28일에 현대측이 '''기습 철거'''하는 바람에 한동안 연극인들이 현대측에 찾아가 항의하는 등의 일을 벌였으나 현대 측은 묵살해버렸으며, 현재는 [[문화일보]] 사옥이 들어서 있다. * 舊 경기도청사: 지금의 서울 광화문 시민마당 자리에 있던 건물로, 원래는 조선시대 의정부 터다. 대한제국 내부(內部: 내무부) 청사로 쓰려고 계획되어 1910년 9월에 완공 예정이었으나, 완공 한 달 전에 국권 피탈(경술국치)되어 경기도청이 되어버린 흑역사가 있다. 1967년에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한 이후에는 [[치안본부]] 청사, 서울시경 별관 등으로 쓰이다가 1990년경 해당 건물부지를 '''주차장'''으로 쓴다고 철거했다. 2016~2019년 들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의정부 때 유구와 도청의 본관은 물론 별관 기초부도 발견되었다. * [[조선호텔]] 구관: 1914년 일본 만주철도가 환구단 터에 호텔 건물을 지은 게 시초이다. 1920년부터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관할했다가 해방 후 교통부, 주한미군을 거쳐 1961년 교통부로 환원됐다가, 1963년 국제관광공사로 운영권이 넘어갔다. 1967년 신관이 건립됨에 따라 철거됨. * 명동 구 [[한국증권거래소]] 본사: 1922년 경성현물취인소로 건설되어 1945년 해방 후 영업을 중단했다. 1950년부터 국방부 정훈국이 입주했다가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 설립 후 본사로 사용되어왔다. 1979년 여의도 신사옥으로 이전한 뒤 1980년부터 제일투자금융 본점이 됐으나, 1998년 후신인 제일종합금융이 퇴출되면서 일반 상가로 사용되었다. 이후 2005년 초에 경매로 넘어간 뒤 그 해 10월에 철거되어 현재 명동아르누보센텀이 들어섰다. * [[동대문운동장]]: 1985년 [[서울종합운동장|잠실에 종합운동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을 대표하는 운동장이었다. 축구장과 야구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축구장이 1926년,야구장이 1925년에 개장했다. 운동경기와 함께 대규모 집회 등 현대사에 큰 일들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역사가 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지에 디자인플라자와 공원을 짓기 위해 2007년 12월부터 철거, 2008년 3월에 완전 철거되었다. 다행히(?) 조명탑과 봉화대는 그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철거 반대론은 당연히 있었지만 그 자리에 성곽 흔적 등등의 유적이 나오면서 바로 묻혀버렸다. 여담으로 저 건물이 해체되고 나서 동대문운동장역도 당연히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결과로 [[서울 지하철]] 역사 중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가장 긴 이름을 가진 역사]]가 되었다. * 구 [[유한양행]] 소사공장: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성주로 222 (심곡본동) 소재. 1936년에 우리 손으로 처음 건립된 근대적 제약공장으로, 제약실험연구소 및 초자공장 등으로 구성됐다. 거기에 사택/집회소용 건물 목조평옥 2동, 공장용 목조평옥 1동이 각각 더 건립되기도 했다. 1939년 증축 당시에 데이빗 바렛 기사장이 참여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북한군과 UN군 막사로 쓰였는데, 전쟁으로 화를 입긴 했으나 내화벽돌 건물이라 골격을 보존했다. 1959년 시설 낙후로 점차 방치되다 1967년 초자공장 시설이 한국펄벅재단에 팔려 '소사희망원'이 차려졌다가 1975년 이후 여러 사람들에게 분할 매각되었다. 이중 금형공장이 된 내화벽돌 건물은 2001년 1월 16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1호로 지정됐으나 2003년 소유주가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해제를 신청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됐다. 이후 건물 일부를 제철업소에 내주다가 2011년에 절반을 헐었고, 2015년 2월 완전 철거되었다. 반면 구 사택 건물은 2005년 부천시가 매입하여 이듬해에 '펄벅기념관'으로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774|고쳤다]]. * [[스카라극장]]: 한때 유명한 극장이었으나 문화재 등록이 예고되자 건물주에 의해 철거되었다. (...) 항목 참고.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구)다빈치관: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철거 직전에는 서울과기대 조형대학에서 사용했다. 조형대가 창학관 등 다른 건물에서도 수업하는 등 장소 부족에 시달리자 뒤쪽에 (신)다빈치관을 완공했고, 기존 다빈치관은 주차장과 공원으로 활용하고자 철거했다. 함께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문화재 보전에 관해 별 논의가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움을 주는 건물이다. 전쟁 때 국군병원으로 쓰여서인지 귀신 목격담이 잦았던 탓에, 문화재 지정되기 전에 일부러 얼른 철거하고 새로 지은 게 아니냐는 썰도 있지만... * [[국세청]] 별관: 원래 해당 건물 일대는 1901년 대한제국 때 고종 황제가 도시개조사업을 실시하면서 조성한 잔디밭으로, 1919년 3.1 운동 때 시위 대열이 도착한 지점이었다. 1937년 일제가 '조선체신사무회관' 건물을 세웠다가 해방 뒤 국세청이 별관으로 썼고,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월 항쟁 때 주요 집회장소이기도 했다. 2015년 '역사문화광장'을 만들기 위해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088373|철거됨.]] * ~~[[조선총독부 청사]]~~: 1926년 건설되어 해방 후 1982년까지 중앙청(정부청사),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김영삼]]정부에 의해 그 해 [[광복절]]부터 철거가 시작되어 대회의실 해체를 마지막으로 1996년 11월 13일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경복궁 흥례문이 복원되었다. 이에 고고학계 사이에선 "통일 전까지 새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짓고 철거하자"는 온건적인 의견도 있었고, 해체 후 이전 계획도 있었으나 시간 문제도 있고, 2000억원으로 예상되는 비용 문제로 인해[* 차라리 똑같은 모습으로 새로 짓는 비용이 더 쌌으며, '''정부는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복원할 가치는 없다고 결론내렸으며,''' 설사 새 박물관을 짓고 철거한다 해도 정부와 국민들은 그럴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다른 건물과 달리 취소선이 그어진 이유. 참고로 철거에 들어간 비용은 총 117억원.] 마침내 철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이전을 위해 마련한 부지가 바로 지금의 독립기념관 내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당시 일본이 총독부 건물을 자국으로 이전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묵살함과 동시에 건물을 폭파해버렸다는 루머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 [[가좌역]] 구 역사(지상역사): 위의 인천역과 같은 사유. 1970년대 초반에 지어졌다고 한다. 서울내에서 보기 드문 70년대 이전 양식의 중규모 역사. 그리고 경의선 전철 2단계 개통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건널목을 건너 승강장으로 통하는 전철역'''이었다.[* 일반 여객철도에는 이런역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물론, 지금은 한국 전철역중에 저런역은 '''없다.''' 가좌역을 지하화하면서 지상역으로 통하는 통로를 폐쇄했기 때문. 현재 지상 승강장으로 가려면 지하역을 거쳐가야 한다.] 2단계 개통 이후에는 역사를 지하화하여 지상역사는 버려진 상황. 현재 생사(?)가 그야말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가 결국 2013년 3월에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못미]] * [[오천역]]: 국내에서 '''딱 두 곳만 남아있는 협궤철도 역사 중에 가장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역사였다.''' 민간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간지 30년째라고. 이천 마장택지지구 개발에 의해, 역사가 아예 철거될 위기에 놓여있는데, 구 [[청평역]], [[수색역]]처럼 빨간벽돌의 건물로서, 한국전쟁 이후로 꽤 오랫동안 보존되어 있는 듯 하다. 오천리에 거주하는 주민 분 말씀에 따르면, 이천시에게 지속적으로 건의를 하면 보존이 가능하다고 해서 건의를 넣었으나 토지보상이 이미 완료된 지역이라 2015년 안으로 철거 할 예정이고 '''보존계획은 없다'''라고 못박았다. 결국 오천역은 재개발로 인해 2015년 11월 30일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구 경성성서학원: 1921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이 지금의 서울 북아현동(아현성결교회 자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었던 5층짜리 벽돌 건물. 1974년 서울신학대학교가 부천으로 이전한 후 명지병원에 매각되었다가 1997년 인근의 아현성결교회가 매입해서 부속 건물로 사용했다가 2010년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보존을 위해 건물 안전 진단을 실시한 결과 심한 노후화로 안전대책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으면서 건물 이전 및 복원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결국 2010년 10월 20일에 철거되었다. 사실 아현성결교회가 사용할 당시에 이미 바닥이 기우는 등의 문제로 4~5층은 사용하지 못하고 비워둔 상태였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전복원이 가능한 수준이었고, 아현성결교회 측도 서울신대에 이 건물의 이전복원을 제안한 바 있었기에 성결교단 내에서도 이 건물의 철거는 뜨거운 논쟁거리였다고 한다. * [[회덕역]]: 1940년에 준공되어 [[대전광역시|대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일제강점기 역사.[* [[호남선]]상의 간이역사들은 [[1977년]] 복선화 당시 모두 凸자 역사로 재건축되었고, 같은 시기에 지어진 신탄진역도 정차열차가 늘어나면서 역사를 재건축했기 때문에 회덕역사가 대전에서는 마지막 일제강점기 역사였다. 참고로 폐역 후에도 현존하는 원정역 건물은 1970년 보통역 승격 당시 건축된 것이다.] 화물 수송의 비중이 크고 정차하는 여객열차가 몇 안되어서였는지 지역 주민들의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2004년경 소리소문없이 철거되었다. 현재 화물역으로서의 기능을 감안해도 현재의 회덕역사는 너무 크고 화려한데다, 가뜩이나 근대문화유산 보존에 소극적인 대전시의 행정과 관련하여 중도일보에서도 대표적인 근대문화유산 말살 사례로 지목할 정도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사례이다. * [[경성제국대학]]예과 교사: 1923년 겨울에 건축을 시작하여 1924년에 준공된 한반도 최초의 [[대학]]교사. 일본의 대학 예과제도(예과2년, 본과 4년)를 따르던 경성제국대학의 대학생들은 이곳에서 예과 2년을 지내며 교양을 쌓고(말이 교양이지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노력을 요구했다) 본과(동숭동 법문학부, 의학부, 공릉동 이공학부)로 진학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예과로 쓰이다가 [[한국전쟁]] 당시 불타서 외벽만 남았으나 재건해서 70년대까지 서울대학교가 사용하였다. 이후 병원건물, 상가건물로 쓰이다 마지막으로 [[한림대학교]] 의대가 2010년대까지 사용했고 2015년 4월 조용히 철거되었다. 외벽은 1924년 지어질 당시 모습을 상당수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치가 높은데다 한국의 [[대학]] 역사에도 중요한 유산이기도 했기에 상당히 아쉬운 부분. * [[대구시민운동장]] 주경기장: 1948년 개장한 종합운동장으로, 세월이 흐르며 노후화가 심각하여 [[DGB대구은행파크]]로 재건축되어 사라졌다. 본래 역사성을 고려해 조명탑과 본부석 일부 시설을 남겨놓으려 했지만, 설계 과정에서 안전, 공간 활용 등 이유로 시설 대부분을 철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으로 인해 철거되고 말았다. * [[구 부산본부세관|구 부산세관]]: 1911년에 완공됐으며 한국전쟁때는 미군 탄약 창고였다가 1970년대까지 쓰인 르네상스 양식의 세관 건물이었다. 1970년대에 지방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철거되었다. 단 [[북항 재개발]]에 복원 계획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